GILLETTE는 나의 아버지였다

GILLETTE SAGA  ·  THE FAMILY

GILLETTE는 나의 아버지였다

THE FAMILY · 01


나의 아버지는 상처 속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열 살이셨을 때, 그분의 어머니는 피에 물든 옷 두 벌을 받으셨다. 그 옷은 아버지의 외삼촌의 것이었다 — 이탈리아 육군 장교로, 러시아 전역에서 실종된 사람이었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무덤도 없었다. 서명도 없었다. 조각난 옷과 침묵만 돌려준 전쟁의 빚뿐이었다.

그날, 그분의 어머니가 우시는 동안, 나의 아버지는 첫 번째 규칙을 배우셨다:
인생은 할인해 주지 않는다.

그분의 다른 두 외삼촌은 카라비니에리에 들어가 고참 부사관이 되었다. 규율은 집안의 가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숨 쉬는 공기였다.

아버지는 LAGONEGRO의 살레시오회 학교를 졸업하시고 예비역 장교 후보생의 길을 택하셨다. 군대 생활로 아들을 또 하나 잃을까 두려웠던 그분의 어머니는 2년 뒤 아버지를 전역시키셨다. 아버지는 22세셨다. 이미 대위셨다.

이미 장래가 밝은 경력 안에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셨다:
“조용한 성공. 광고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는 LUNGRO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COPANELLO의 한 해변 클럽 매니저가 되셨다. 그 뒤에는 나폴리에서 보험 회사의 조사관으로 일하셨다. 아버지는 그곳이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리셨다: 말은 너무 많고, 윤리는 너무 적었다.

6개월 뒤 아버지는 사직하시고 Castrovillari로 돌아가 누이의 집에 머무셨다.

어느 날 한 카페에서 아버지는 기름 묻은 종잇조각 하나를 주우셨다. 거기에는 『Corriere della Sera』의 구인 광고가 실려 있었다. 영업 사원을 찾는다는 광고였다. 회사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원하셨다.

한 자리에 지원자가 120명이었다.

아버지는 3위를 하셨다.

앞의 두 지원자는 더 높은 월급을 협상하려 했다. 그들은 탈락했다.

나의 아버지는 한 달에 80,000리라를 받아들이셨다.

1962년 1월이었다. 우체국 직원이 15,000리라 남짓을 벌던 때였다.

두 달 뒤, Gillette는 아버지의 월급을 120,000리라로 올렸다. 그다음 달에는 150,000리라로.

그것은 자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정이었다.

Gillette는 자신이 영업 사원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한 사람에게 투자한 것이었다.

Frega 과정

밀라노에서는 모든 신입 사원이 나의 아버지의 담당 구역에서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고 정했다.

대부분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은 무너졌다. 사직서에 서명할 수 있게 공항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처음 사흘을 — 머리가 멍해지지도, 무너지지도, 신경이 끊어지지도 않고 — 버텨 낸 사람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Frega 과정에서 살아 나왔다.”

그들 가운데 Piero Chiummo가 있었다.

그는 광고·판촉 책임자로 왔다. 그러다 Frega 방식의 충격파를 맞았다.

날카로운 질책. 분명한 규칙 하나:
“놀러 오셨다면 밀라노로 돌아가십시오. 고객이 무엇보다 먼저입니다. 우리 월급을 주는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

CHIUMMO는 훗날 25년 동안 Gillette Italia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그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는 이 직업의 문법을 배웠다.

칼라브리아가 시험대였다

나의 아버지의 숫자는 본사 곳곳에 울려 퍼졌다: 유통, 제품 진열률, Nielsen 시장 점유율 — 아버지의 담당 구역 전체에서 99.5퍼센트.

회사의 의례는 단순했다:
“Frega가 칼라브리아에서, 황폐한 지역에서 해낼 수 있다면, 당신들은 어디서든 해낼 수 있다.”

아버지의 방문 경로는 4주 앞서 계획되어 있었다.

호텔. 식당. 카페. 담배 가게. 모든 방문지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모든 약속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즉흥은 없었다. 한눈팔기도 없었다.

먼저, 문제는 현장에서 해결되었다.

그다음에 밀라노에 보고되었다.

완벽한 기하학.

Gillette는 이미 국제적 발판을 넓혀 가는 세계적인 회사였고, 1960년대 초는 면도기 시장에 거대한 상업적 압박과 혁신이 몰려온 시기였다. 그러나 칼라브리아에서 회사의 진짜 경쟁 우위에는 이름이 있었다: Frega.

“Day Outstanding”

그때 Gillette의 신용 관리 담당자들이 왔다. 중요하게, 거의 위협적으로 들리는 영어 문구 하나로 무장한 채:
“Day Outstanding.”

그 근방에서는 영어가 흔히 쓰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문구만으로도 불안해지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고객이 송장 대금을 치르는 데 걸리는 평균 일수를 뜻했다.

신용 관리 팀은 영업 사원마다 배정된 분기별 거래 명세서를 가져와 함께 분석했다. 밀라노에서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칼라브리아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그들은 궁금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역사적으로 가난한 지역으로 여겨지고, 공장도 적고 산업도 빈약하고 경제 등급도 낮은 칼라브리아가 — 어떻게 밀라노에 견줄 만한 지급 신뢰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

나의 아버지는 영업 이사인 Di Tullio 박사를 바라보셨다.

Di Tullio는 그 순간을 붙잡았다.

“모르셨습니까? Frega는 무장하고 다닙니다. 돈을 안 내는 첫 번째 고객은 총알을 맞지요.”

세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보고서와 숫자와 서류를 챙겨서 — 떠났다.

총을 든 Gillette 영업 사원의 전설이 고객들 사이에 퍼졌다.

그 뒤로 아무도 아버지가 재킷 안에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기를 지니고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니고 계신 것은 오직 마음뿐이었다 — 회사를 향한, 그리고 가족을 향한.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 둘은 같은 것이었다.

금요일 밤의 시험

Gillette International은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예고도 없이 Gillette Europe의 CEO인 DE WAKEFIELD 씨가 밀라노에 도착했다. 그는 DI TULLIO 박사에게 즉시 칼라브리아로 떠나라고 했다.

그는 숫자를 미쳐 날뛰게 만드는 그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내기는 단순했다.

금요일 저녁 8시에 Frega가 집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Di Tullio는 그가 일하고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들은 방문 경로의 마지막 담배 가게에서 나오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놀란 기색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인사하시고, 자신이 한 일을 점검하고 싶은지 물으셨다.

그들은 감히 그러지 못했다.

영국인은 이것이 예외적인 상황이냐고 물었다.

나의 아버지는 면도날처럼 대답하셨다:
“이것이 제가 평소에 일하는 방식입니다.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지금 바로 사직서에 서명하겠습니다.”

그들은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그들은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그들을 멈춰 세우셨다.

“커피값은 직접 내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제 손님이 아닙니다. 서명된 방문 경로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들은 돈을 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이해했다.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명예의 강령.

윤리의 강령.

법의 강령.

단 하나의 정리(定理).

이들이 Gillette를 세운 남자들이었다.

이것이 시스템이었다.

이것이 나의 아버지였다.

GILLETTE는 나의 아버지였다.


Ferdin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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